RC 스페셜 스토리

120년을 이어온
인도주의의 등불

고종황제의 명으로 시작된 적십자병원 이야기

1905년 고종황제의 “자연재해나 대규모 사고로 다치거나 병든 백성을 치료하라”는 명으로 시작된 적십자병원은 120년간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중심 역할을 해왔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변함없이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자리를 지켜온 적십자병원의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1960년대 구순구개열 수술
1960년대 구순구개열 수술
1966년 인천적십자요양병원 증축 준공식
1966년 인천적십자요양병원 증축 준공식
1960년대 무의촌 이동 진료반
1960년대 무의촌 이동 진료반
1906년 최초의 적십자병원
1906년 최초의 적십자병원
1950년 농어촌 무료 순회진료를실시한 부산적십자병원
1950년 농어촌 무료 순회진료를실시한 부산적십자병원
1977년 적십자병원선 무궁화호
1977년 적십자병원선 무궁화호
이중섭 화백
이중섭 화백
가난한 화가의 마지막을 지켜본 병원

1956년 9월, 서울적십자병원의 차가운 병실에서 한 화가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바로 ‘황소’와 ‘흰 소’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중섭이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채 극심한 가난을 겪는 중에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는 거식증과 간염으로 무연고자가 되어 생을 마쳤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18만 원의 밀린 병원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적십자병원이 가난한 화가의 사정을 참작해 병원비 9만 원을 삭감해준 것입니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적십자병원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오랜 에피소드 속에 적십자병원이 걸어온 120년 역사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뜻으로 시작된 공공의료의 꿈

1905년 7월 8일, 고종황제의 명을 통해 대한적십자병원이 탄생했습니다. 그해 10월 15일 경복궁 후문 근처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 적십자병원은 조선왕조 내내 이어져온 혜민서와 활인서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었습니다. 개원 당시 의원 3명, 간호부 3명 등 규모는 단출했으나 1907년 대한의원에 합병되기까지 총 6만 2천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시작된 일제강점기와 함께 대한적십자사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되며 어려운 시기를 맞았습니다.

역경과 극복, 그리고 현재까지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 전상병을 돌보기 위해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고 1920년 간호원양성소를 운영했지만, 재정 여건으로 1기 13명을 배출한 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해방 후 1949년 대한적십자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새출발한 이래 적십자병원은 한국 공공의료의 한 축을 담당해왔습니다. 1950년대 농어촌 무료 순회진료, 1960년대에는 개안 수술과 구순구개열 수술 등 첨단 의료기술을 선보이며 의료 발전을 이끌었고, 1970년대에는 병원선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전국 13개 병원을 운영하며 전성기를 맞은 적십자병원은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하는 광주적십자병원의 모습처럼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했습니다.
1990년대 국민의료보험 전면 실시와 민간병원 급증으로 의료환경이 변화하면서 대한적십자사는 현재 7개의 적십자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어(6개) 방역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등, 변화하는 의료환경 속에서도 적십자병원은 꾸준히 서민을 위한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중섭의 마지막을 지켜본 그 따뜻한 마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RC 국내 리포트폭우가 쏟아진 그 밤,
우리는 깨어 있었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병원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