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 국내 리포트
달려가고, 지키고,
회복하다
경북 산불 현장 26일간의 긴급구호활동 기록
경북 의성의 한적한 산골 마을에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강풍을 타고 번진 불길은 순식간에 마을을 집어삼켰고,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뒤로한 채 황급히 대피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화마 속에서 사람들은 깊은 불안에 휩싸였고, 고립된 마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습니다.그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대한적십자사였습니다. 구호요원과 구호차량, 심리회복 전문가, 의료진이 함께 투입되어 불안에 떨던 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폈습니다.


산불 현장에서 생명과 일상을 지키다
2025년 3월 22일, 경상북도 의성군 3곳에서 강풍과 건조한 기후 속에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삽시간에 번진 불에 산림청은 산불 대응 3단계를 발령했습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등진 채 급히 대피했고, 중앙고속도로 일부 통제로 지역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재난관리책임기관 및 긴급구조지원기관으로서 위기의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경북지사를 중심으로 대구, 경남, 강원, 충북지사와 본사 인력까지 총동원된 이번 대응은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직원, 구호요원, 봉사원 등 다양한 인력이 현장에 투입되었고, 이동급식차량, 재난회복지원차량, 이동식세탁차량이 현장에 도착하며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재민들을 위한 쉘터 117동이 설치되고, 6,920인 분의 급식과 함께 6,884세트의 긴급구호물품이 즉각 배포되었습니다. 4월 16일까지 이어진 27일간의 구호활동에는 총 4,323명(직원 320명, 봉사원 3,803명, 활동가 200명)이 참여했으며, 총 11만여 점의 구호물품이 지원되었습니다(긴급구호품 1,970개, 비상식량 45세트, 담요 11,465개, 생수 21,600병, 쉘터 671동 등). 급식 112,710명 분, 세탁 583명, 샤워 35명, 회복 지원 610명 등 생활지원도 철저히 이루어졌습니다. ‘움직이는 심리상담실’이라 불리는 재난회복지원차량은 담요, 비상식량, 생수 등의 긴급구호물자 배분 장소이자 심리상담 공간으로도 활용되어 이재민들의 불안과 외로움을 다독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점, 적십자사의 재난 의료 지원
영주적십자병원은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임시청사 대피소에 이동진료소를 설치하고 긴급 의료지원에 나섰습니다. 의사, 간호사와 행정요원으로 구성된 재난대응의료팀은 화재 연기로 인한 호흡기 질환자, 외상자 응급처치와 고령층과 아동, 만성질환자를 대상으로 현장 건강 모티터링 및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재난 대응에 긴급구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심리 지원’입니다.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의 전문가들은 4,585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심리 지원을 실시했습니다.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충격으로 인한 불면과 불안, 우울감 해소를 위한 노력은 물론 트라우마 호소자를 대상으로 정서 안정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재난 발생 시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대응을 위해 대한적십자사는 2025년 4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재난대응의료팀(보건의료 ERU)’ 발대식을 갖고, 국내 재난의료 대응체계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보건의료 ERU는 재난 발생 시 이재민과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의료지원을 제공하는 긴급대응 조직입니다. 전국 4개 권역에 각각 1개 팀씩 총 4개 팀이 배치되어, 재난 유형과 지역 특성에 맞춘 신속하고 통합적인 의료 대응을 펼칠 계획입니다. 재난 구호 현장에서 응급처치와 기초 건강관리는 물론 감염병 예방, 정신건강 상담 등 포괄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단순한 응급 구조를 넘어 ‘회복의 시작점’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재난 의료 대응의 표준을 마련하고, 국민이 체감하는 인도주의 실천을 현실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재난을 대비하는 안전 교육 프로그램
경북 의성 산불은 ‘예고 없는 재난’이 얼마나 빠르게 일상과 생명을 위협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기후위기, 대형 산불, 감염병, 지진 등 예측 불가능한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시민 개개인의 대응 역량은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는 핵심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적십자사는 누구나 재난 상황에서 ‘첫 번째 대응자’가 될 수 있도록 재난안전교육과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난안전통합교육’은 화재, 수해, 지진, 감염병 등 다양한 재난에 대한 이해와 대처 능력을 높이는 과정으로, 일반 국민은 물론 학교, 기업,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폭넓게 제공됩니다. 상황별 대응 매뉴얼은 물론 실제 재난 발생 시 판단력과 행동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구성돼 있습니다.
‘구호교육’은 재해 구호의 기초 지식과 구조, 응급처치, 인명구조, 심리응급지원 등 실무 중심의 실습 과정으로, 누구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갖추도록 돕습니다. 또한 지역사회 기반의 재난 훈련, 아동과 노인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되며, 재난에 강한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위기의 순간 나와 이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더 많이 만드는 문화의 확산이자 마음의 훈련입니다. 전문가와 시민의 경계를 허물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이들을 양성하는 것, 이것이 적십자 교육이 지향하는 인도주의입니다. 재난은 누구에게나닥칠 수 있지만, 함께 준비하고 대응한다면 회복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예방에서 대응, 회복까지 이어지는 적십자의 교육은 생명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조천호 (대기과학자. 전 국립기상과학원 원장)
기후 변화와 지구 시스템을 연구한 대기과학자로, 국립기상과학원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원장을 지냈다.
미국 해양대기청에서 탄소순환을 연구했으며, 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로도 활동했다. 『파란하늘 빨간지구』 등기후와 인류 미래를 주제로 여러 저서를 펴냈고, 현재는 기후 변화 과학과 지속가능한 삶의 연결을 탐구하고 있다.
기후재난,
님아 그 지뢰밭에 들어가지 마오!
인류는 더 이상 자연적인 기후 변동에 단순히 적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는 기후 변화를 직접 일으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수억 년에 걸쳐 생성된 화석연료를 태우며 번영을 이루었지만, 그 대가로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안정적인 기후 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1850~1900년)보다 약 1.25℃ 높아졌습니다. 과거에도 기후는 변화해왔지만, 현재의 기후 변화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에서 심각합니다. 지난 100년간 인간 활동으로 인한 기온 상승 속도는 공룡 멸종 이후 가장 빠른 자연적 변화 속도의 10배에 이릅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는 기후 균형을 무너뜨려 시스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기후위기의 핵심은 단순히 기온 상승의 ‘크기’가 아니라 ‘속도’에 있습니다.
기후 변화의 양상은 당뇨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도 유사합니다. 당뇨병이 혈당 조절 시스템을 망가뜨려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하듯, 지구 온난화도 기후 조절 시스템을 무너뜨려 치명적인 극한 현상을 빈번하게 유발합니다. 견디기 힘든 폭염, 집중호우, 극심한 가뭄, 거대한 태풍 등이 그 예입니다.
우리나라는 여름이 과거(1940년 이전) 98일에서 최근 118일로 20일 늘어났습니다. 앞으로 폭염과 열대야는 각각 2배, 5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강수량도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강수일수는 전 계절에 걸쳐 감소하고 있어, 비가 오면 폭우가 되지만 가뭄 또한 심화되는 불안정한 기후 구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뜨거워지는 지구는 곧 더 불안정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물, 식량, 거주 환경 등 생존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에서 2℃로 상승할 경우, 불과 0.5℃ 차이로 해수면 상승으로 집을 잃는 사람이 천만 명, 물 부족을 겪는 인구는 50%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 불안정, 정치 갈등, 국경 분쟁, 난민 발생, 인종 청소 등으로 이어지는 파괴적 충돌의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기후위기는 자연재난이나 감염병, 경제위기 중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위기를 압도하는 ‘문명 위기’ 입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지속한다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지구 환경은 우리의 욕망보다 먼저 한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은 지구가 ‘열병’을 앓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사람의 체온이 1℃ 오르면 이상을 감지하고, 2℃ 오르면 병상에 눕게 되며, 3℃를 넘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지듯, 지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온실가스를 배출할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은 어렵지만, 현재의 기후 정책대로라면 3℃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두려운 미래는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맞서싸우기 때문입니다. 지구 평균 기온 1.5℃ 또는 2℃를 넘어서는것은 점차 지뢰밭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후 변화에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으며, 현재보다 3~6배의 투자로도 1.5℃ 상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국방비의 2배 수준에 불과합니다. 지구가 존재해야 국가도 존재할수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방치하는 것은 “나는 지뢰밭에 계속 들어가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던 길에서 방향을 틀어 가능한 한 빨리 지뢰밭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기후 변화에 먼저 대응하지 않으면, 기후변화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올 것입니다. 이제는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미래는 여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최악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붙잡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을 뿐입니다.